보리수와 린덴바움, 같은 나무야 다른 나무야?

보리수와 린덴바움, 같은 나무야 다른 나무야?
보리수 vs. 린덴바움

보리수와 린덴바움, 같은 나무야 다른 나무야?

린덴바움 유치원 앞에서 시작된 의문

어제 오후 산책 도중, ‘린덴바움 숲 유치원’을 지나치게 되었다. 문득 머릿속에 멜로디 하나가 떠올랐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 한 곡, 바로 ‘보리수(Der Lindenbaum)’.

‘보리수’라니. 그 말에 마음이 잠시 머문다. 전에 속리산 법주사에서 보았던 두 그루의 나무가 생각났다. 이젠 돌아가시고 곁에 계시지 않는 시어머님과 함께 보았던 보리수. 그 안내문에는 ‘보리수’라고 적혀 있었다.

아, 그럼 이 린덴바움이 그 보리수인가? 법주사의 보리수가 린덴바움? 잠깐, 린덴바움은 독일 나무 아닌가?

붓다의 보리수와 슈베르트의 보리수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나무도 분명 ‘보리수’였는데… 그렇다면 그 보리수와 슈베르트의 보리수가 같은 나무라는 말인가? 뭔가 이상하다. 열대 기후의 인도에서 자라는 나무가 추운 독일에서도 자란다고? 그럴 리가.

결국 검색창을 열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두 나무는 전혀 다른 종이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는 무화과과의 ‘Ficus religiosa’, 영어로는 ‘Bodhi tree’, 혹은 ‘Sacred fig’라고 불린다. 반면 슈베르트의 린덴바움은 ‘Tilia’ 속, 즉 피나무과의 유럽 나무다.

그렇다면 내가 보았던 속리산 법주사의 보리수 나무 역시 인도에서 석가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 보리수와는 아무 관련 없는 엉뚱한 나무, 곧 린덴바움 이겠지?

열매 비교 보리수와 린덴바움, 같은 나무야 다른 나무야?
인도 보리수 vs. 린덴바움

보리수로 번역된 린덴바움의 사연

그렇다면 왜 린덴바움을 ‘보리수’로 번역했을까? 우연히도 경인 님이 브런치에 쓴 글(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64)을 통해 실마리를 찾았다. 1920년대 일본 식물도감에서 유럽의 피나무(Tilia)를 ‘보리자나무(菩提樹)’라고 번역했고, 해방 후 국내에서 발행된 1946년 <신생영한사전>에서도 linden을 ‘보리수’로 옮겼다. 그렇게 잘못된 번역이 정착된 것이라고 한다.

역사적 자료와 실제로 찍은 사진까지 담아낸 쉽게 접하기 어려운 글이었다. 어떻게 이런 내용을 정리해주셨는지, 감탄이 절로 나왔다.

감람나무도 감남나무도, 결국은 번역의 문제

생각해보면 올리브나무를 ‘감람나무’라 번역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는 오랜 세월 중국과 일본을 통해 문화를 간접적으로 받아들이며 그들의 번역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왔다. 그 결과, 감람나무(올리브나무), 보리수(린덴바움), 살구나무(아몬드나무)같은 오역에 익숙하게 되었다. (관련 글: 감람나무는 두 종류? 성경의 감람나무와 중국 감람나무)

지금은 번역조차 생략되는 시대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다르다. 번역할 틈도 없이 외래어가 원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온다. 카페 메뉴, 영화 제목, 책 이름, 학술 용어까지도 점점 번역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번역되지 않는 지금이, 또 다른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름과 본질 사이에서

정확한 번역이란 무엇일까. 올바른 외래어 사용이란 무엇일까. 린덴바움 하나에서 시작된 생각이 꽤 멀리까지 닿는다.

🎵 Der Lindenbaum – Schubert (Winterreise) 가사와 곡의 분위기를 함께 감상하며 마무리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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