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딜리 서커스 유래와 에로스 상의 진짜 정체

많은 분이 피카딜리 서커스의 ‘서커스’라는 이름 때문에 이곳을 과거 곡마단 공연장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이곳의 서커스는 고대 로마의 원형 경기장인 ‘키르쿠스(Circus)’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형으로 된 광장이나 교차로’라는 지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피카딜리 서커스 유래와 에로스 상
피카딜리 서커스 광장

1. 피카딜리 서커스 유래 – 왜 광장 이름이 ‘서커스(Circus)’일까?

피카딜리 서커스를 처음 방문한 이들은 의아해합니다. “광장이라면서 왜 서커스단 공연장 같은 이름이지?” 많은 이들이 곡마단을 떠올리지만, 사실 이는 언어적 유래에서 오는 오해입니다.

가. 원형 경기장 ‘키르쿠스(Circus)’의 차용

서커스 circus(키르쿠스)는 엄연히 고대 로마에서도 사용되던 말로, 원형, 또는 타원형의 경기장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15만 명을 수용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현재는 터만 남아 공원으로 쓰이고 있지요.

18세기 영국에서 도시를 계획하던 사람들은 이 키르쿠스 개념을 차용해 원형으로 설계된 건축물과 광장을 서커스 circus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옥스포드 서커스, 피카딜리 서커스 등 런던 곳곳에 둥근 광장이 많은 이유입니다.

나. 도로 체계와 방사형 도시 설계

다른 나라에선 광장 하면 보통 넓고 툭 터진 네모난 모양이 많습니다. 하지만 유독 영국에는 서커스라 이름 붙은 둥근 광장이 많죠. 런던의 유명한 원형광장만 해도 옥스포드 서커스, 세인트 제임스 서커스, 피카딜리 서커스 등 세 군데나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형태뿐만 아니라, 런던의 도로 체계와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런던은 주요 원형 광장을 거점으로 도로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구조를 띠고 있는데, 이는 효율적인 교통 흐름을 고려한 도시 설계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피카딜리(Piccadilly)’는 재단사의 옷깃에서 시작되었다

피카딜리 하면 나이든 사람들은 서울 종로 3가에 있던 옛 피카딜리 극장을 떠올리게 됩니다. 19세기에 등장한 피카딜리 광장이 종로 3가 극장이름을 따랐을 리는 없고, 어디서 나온 말일까요?

재단사 로버트 베이커의 대박 난 옷깃

17세기, 영국에는 로버트 베이커라는 유명한 재단사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피카딜(piccadill)이란 특별한 옷깃을 만들어 큰돈을 벌었습니다. 피카딜은 스페인어 피카딜로(piccadillo)에서 나온 말로, 작은 가장자리나 칼라 같은 옷깃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막대한 부를 쌓은 그는 현재의 이 지역에 거대한 저택을 세웠고, 사람들이 이 집을 ‘피카딜리 홀’이라 부르기 시작하면서 지역 전체의 지명이 되었습니다.

3. 왜 지금은 완벽한 원형이 아닐까?

피카딜리 서커스를 막상 가보면 “이게 무슨 원형 광장이야?” 싶을 정도로 불규칙합니다. 물론 다른 광장처럼 네모 반듯한 것은 아니지만 동그란 것도 아니예요. 그런데 어째서 원형광장이라고 하는 걸까요?

1819년의 원형, 현대의 상업지구

1819년 설계 당시에는 조지언 양식의 우아한 원형 광장이었습니다. 아마도 자동차도 네온사인도 없는, 마차들이나 오가는 조용한 곳이었겠죠.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도시가 현대적인 상업 공간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점점 주변 건물이 바뀌고 도로가 확장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비정형의 모습이 되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초기 도시 계획의 둥근 흔적과 수백 년 된 지명의 역사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3. 에로스가 아닌 천사, 샤프츠버리 기념비 분수의 반전

피카딜리 서커스 유래와 에로스 상 형제애의 천사상
cc by 2.0 @ wikimedia

가. 런던의 상징, 왜 애욕의 신 ‘에로스’인가?

피카딜리 서커스 한복판에는 에로스 상이 서 있습니다. 10개도 넘는 계단을 오르면 커다란 날개에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어린 에로스도 아니고 다 큰 청년 에로스가 분명합니다. 19세기라면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아주 엄격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어떻게 광장 한복판에 그리스의 신, 그것도 애욕의 신을 버젓이 세워놓았던 걸까요?

대다수 관광객은 이를 당연히 그리스 신화 속 ‘에로스’라 부르지만, 이는 수 세기 동안 정착된 거대한 오해입니다. 사실 이것은 에로스 상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날개달린 청년이 활을 당기는 모습을 보고 그저 에로스라고 했던 것이죠.

나. 에로스가 아닌 형재에의 천사

우리가 에로스라 믿어왔던 이 동상의 진짜 공식 명칭은 ‘샤프츠버리 기념비 분수(Shaftesbury Memorial Fountain)’입니다.그리고 활을 든 이 날개 달린 청년은 에로스가 아니라 기독교적 자선(Christian Charity)’을 상징하는 ‘형제애의 천사’였습니다.

1) 기독교적 자선의 상징

1839년 설치된 이것은 조각가 알프레드 길버트가 디자인한 것으로, 7대 샤프츠버리 백작 앤서니 애슐리 쿠퍼의 자선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신병자 치료를 개선하고 아편 거래 중단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어린이 노동을 금지해 아이들이 착취당하는 대신 교육을 받도록 해 많은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분수는 정신병 환자 치료 개선, 아편 거래 금지, 어린이 노동 착취 방지 등 평생을 헌신했던 ‘7대 샤프츠버리 백작(앤서니 애슐리 쿠퍼)’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893년(설치)에 세워졌습니다.

2) 본질이 잊힌 자리, 이름만 남은 오해

세월이 흐르며 백작이 실천했던 기독교 정신과 박애주의는 대중의 기억 속에서 점차 희미해졌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엉뚱하게도(어쩌면 치욕스럽게도) 애욕의 상징 에로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대중은 동상의 날개와 활이라는 시각적 요소만을 보고, 이를 가장 대중적인 신화 속 인물인 ‘에로스’로 치환해 버렸던 거죠.

고귀한 자선의 상징이 애욕의 상징으로 뒤바뀐 이 현상은,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가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런던의 교회가 펍(Pub)으로 변모하는 소식만큼이나 씁쓸한, ‘역사의 오독’이 남긴 현대의 아이러니입니다.

이처럼 이름과 본질이 어긋나 생긴 오해는 비단 지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나무 이름 하나를 두고도 문화권마다 제각기 다른 해석이 존재하죠. [보리수와 린덴바움: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오해] 편에서는 언어의 번역 과정에서 우리가 놓쳤던 또 다른 본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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